'진산 조은산'이라는 청원인이 올렸다.
해당 방송분은 편집될 예정이다
"무소속 출마는 꿈에도 생각 안했다."
"적절한 시기에 태어나, 세상을 많이 바꾸고 갈 것이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노동절 128주년
권력을 처벌할 시스템이 없을 뿐이다
촛불혁명의 구호가 "박근혜 퇴진!"이었다면, 1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구호는 "민주주의를 감행하자"가 돼야 한다. 학교에서, 일터에서 어디까지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지 실험해보자. 삶의 현장을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공간으로 바꿔보자. 우리가 얼마나 성숙한 민주주의자인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성숙한 민주사회인지 점검해보자.
시민들이 주말을 바쳐 광장에 나온 지난 날, 현우씨 역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광장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국회 앞에서 촛불 모자를 쓰고 선거제도 개혁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진행했다. 여전히 현우씨의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여자들이 무리를 지어 구호를 외치니까 지나가는 남성들이 '기특하다'는 둥, '여자들이 공부나 할 것이지' 하는 망발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그 말을 듣고 '공부는 아저씨나 하세요', '우리는 여기서 세상을 바꾼다'는 구호를 즉흥적으로 외쳤다. 그게 페미존의 구호가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쯤의 일인데 담임교사가 학생 한 명을 불러내서 다른 학생들을 겁 준답시고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때리는 걸 본 적이 있다. 그 경험 이후부터 학교랑 불화하기 시작한 것 같다. 왜 사람이 사람을 저렇게 때리지?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때리는 건 잘못된 일 아닌가, 하는 감각이 생겨났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할지가 막막한 때일수록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안 하는 일이다. 특히 낡은 언어를 극구 피해갈 줄 알아야 한다. '독자적 핵무장'이니 '전술핵 재배치'뿐 아니라 '북을 대화로 끌어내는 더욱 강력한 제재와 압박'도 낡아빠진 언어이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통일만이 살길이다'는 익숙한 옛 노래를 다시 불러도 곤란하다. 그렇다고 '이제 통일은 잊어버리고 남북이 이웃나라로 평화롭게 살자'는 주장도 새로울 것 없는 공리공론이다. 이 땅은 무작정 통일을 부르짖는다고 통일이 되고 평화가 오는 곳도 아니려니와, 점진적·단계적 과정으로서의 통일마저 외면한 채 두 나라의 항구적 평화공존을 주장한다고 평화가 달성되는 지역도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며 가장 먹먹했던 순간은 바로 낯선 이에게 폭력을 당해 병원에 입원한 게딘이 자신의 건강보다 HIV감염인 파트너 조나단의 건강을 챙겨달라고 광부노조 가족에게 부탁하고, 조나단이 에이즈 감염사실을 광부노조 가족에게 털어놓는 장면이었다. '에이즈'가 뭐든 상관없다는 듯 그의 손을 꼭 잡아주는 광부노조 가족의 모습은 마치 약자와 약자가 연대하는 모습의 완성형 같았다. 런던프라이드는 슬픔과 분노가 가득했던 시대에 약자와 약자가 서로의 손을 잡고 어떻게 버티고 변했는지 보여주는 영화다.
혁명의 일차적 성공이 혹시라도 4·19 이후와 같은 변질로 귀결되지 않을까, 또는 87년체제의 단순한 변형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어느 자리에서 하든 긴요하다. 그런 점에서 '광장'과 '일상'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깊이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렇게 연결되어 있음을 상시적으로 자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주말마다 집회에 참석하는 것은 주중의 힘든 일상을 개혁하기 위해서이고, 주중의 압박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는 것은 주말의 행동을 통해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 아닌가.
거리에서 "박근혜 퇴진"과 "이재용 처벌"이 적힌 유인물을 나누어 주고 있었는데, 서너 명의 어르신들이 다가와서 묻더군요. "이런 일 하면 얼마 받아요?" "대체 얼마 받고 이러는 거에요?" 드문 일은 아닙니다. 세월호 유족과 고 백남기 님의 유족, 그리고 그 곁을 지켜온 사람들이 모두 그러한 재단을 당해 왔으니까요. 뭐, 그러거나 말거나 제 길을 걸어온 사람들에 의해 그나마 세상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반올림도 계속 그럴 참이구요.
2017년 3월 10일의 불가역적인 결정에 따르는 것은 규칙을 존중하는 것이고, 스스로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행위다. 그러나 광장에서는 여전히 불복의 함성이 들려오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방법은 하나뿐이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내 생각과 다른 소수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존중해야 한다. 대통령 박근혜의 일탈에 관대하고, 선의를 믿는 사람들은 대체로 나이가 든 세대다. 이들이 태극기를 들고 있다. 살아온 과정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내 마음대로 바꾸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탄핵을 지지하는 다수는 상처받은 소수의 마음을 헤아리고 위로해서 극단적인 충돌을 피해야 할 것이다.